[출처 : 야후! 세상, 문요한의 내 마음속 비타민]

얼마 전 한 직장여성이 진료실을 찾았다. 아직 아이가 없는 신혼인데 결혼 전에 다른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남편이 뒤늦게 알고 육체적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전 애인과의 관계를 들먹거리며 자신이 속았다는 이야기를 해서 속을 뒤집어 놓는다는 하소연이었다.

나는 자라면서 성교육다운 교육은 전혀 받지를 못했다. 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치고 다들 비슷했겠지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성에 대해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여성잡지나 낡아 빠진 가정대백과 사전을 뒤적거리며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독학으로 깨우쳐야 했고 친구들과의 음담패설이나 몰래 나눠보는 음란물만이 성적 지식과 욕망을 채워가는 큰 수단이었다. 그러다보니 성과 관련된 가치관과 지식이 제대로 터득되었을 리 만무하다.

아직도 나를 포함한 많은 남성들은 여전히 순결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연애 시에는 여자들이 섹스에 대해 허용적이기를 바라면서 막상 결혼할 때는 젊고 성적 경험이 없는 여자를 선호하는 뚜렷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남성의 경우에는 결혼 후에도 처녀성을 확인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애를 쓰는 경우도 있고 이로 인해 위 사례의 부부처럼 큰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이런 남성들의 태도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방어에 급급하다.

하지만 남성들의 이런 태도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면 위선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적인 현상에 가깝다. 결혼을 결정할 때는 남녀모두에게 공히 중요한 것은 사랑만큼이나 배우자가 자신의 2세를 잘 키워줄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본능적으로 따지기 때문이다. 여성에 비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들에게 있어서 성적 경험이 없고 젊은 여성이란 자신의 2세를 보다 건강하게 낳고 오랫동안 길러주며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바람직한 배우자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능대로만 살 수 없는 문명사회에서 그것도 남녀평등의 가치가 점차 구현되는 현대사회가 되어갈수록 남성들은 이 문제에 관해 딜레마에 빠져 있다. 남녀평등이라는 시대적 추세에 비추어보면 스스로의 생각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혼전순결은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적용되어 왔고 남성의 힘에 의해 이어져 왔음은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남녀평등을 전제로 한 순결논쟁에 관해서는 남성들의 경우 백이면 백 여자에게 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억지 논리로 흐르거나 감정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보다 논리적으로 갈려면 남녀 공히 순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남녀 모두 혼전 순결이 중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둘 다 남성의 본능에 반하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이 시대 남성들의 선택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남녀평등의 시대를 역행하거나 아니면 괴롭더라도 시대의 변화를 인정해가는 쪽으로 본능을 제어하고 생각을 달리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혼전순결’은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지켜내기 힘들만큼 반(反)본능적이고 비현실적인 가치라고 본다. 결혼 평균연령이 30세를 넘어가고 사춘기는 갈수록 빨라져만 가는데 15년 이상 성적 충동을 인내하고 자기개발에 전념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24시간 도처에서 성적자극이 난무하고 성의 상품화가 가속화되어 가는 이 사회에서 송곳으로 무릎만 찌르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혼후순결이 무너져버린 이 사회에서 어찌 혼전순결의 깃발만 더 높이 치켜들라고 할 것인가.

사회가 많이 변했다. 그에 맞는 의식의 변화와 성도덕의 재정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순결문제에 대해 현실적이고 좀더 솔직한 접근만이 우리사회가 성과 관련해서 보다 더 도덕적이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본다. 성(性)은 성(性)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하라고 권장할 필요도 없지만 하지마라고 윽박지를 일도 아니다. 문제는 올바른 성지식을 정확히 습득하고 시대에 맞는 성도덕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도록 좀더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피임에 대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성인이 태반이고 성관계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아직도 많다.

제발 수업시간에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가슴 아픈 기사가 더 이상 안 보였으면 좋겠다.

문요한 (태능성심정신과 원장)